DJ TRACE | 서희역사관, 전쟁없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정치다
최종 수정일: 10월 24일
2026-10-07 글 박성미
김대중은 서희를 ‘우리 겨레의 위대한 스승’이라고 칭했다. 1999년 서희 서거 1000주기 추모학술대회에 보낸 메시지에서였다. 천 년 전 서희는 거란의 침략 앞에서 적장과 마주 앉아 전쟁의 확대를 막고 고려의 이익을 지켰다. 김대중 역시 안보를 지키면서 대화와 협력으로 남북의 긴장을 낮추려 했다. 이천 서희역사관에서 우리는 두 시대의 정치를 함께 읽는다. 국민이 전쟁의 두려움 없이 살아갈 나라를 만드는 것, 그것이 정치의 책임이라는 생각이다.
1999년 11월 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이천문화원과 고구려연구회가 마련한 서희 서거 1000주기 추모학술대회가 열렸다. 주제는 ‘서희와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이었다. 서희의 가계와 고려의 정치, 외교와 국방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추모식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메시지가 낭독됐다.
이천시가 발간한 『명분과 실리, 서희의 외교론』에는 김대중이 서희를 이렇게 칭송하고, 역사적 기록에 비해 그의 업적을 기리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한 메시지를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
왜 서희를 ‘겨레의 스승’이라고 했을까. 그 의미를 생각하려면 먼저 서희가 마주했던 위기로 돌아가야 한다. 993년, 거란군이 고려를 침략했다. 고려 조정에서는 영토 일부를 내주고 전쟁을 끝내자는 의견이 나왔다. 서희는 거란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그들이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 파악하고 협상에 나섰다. 거란의 장수 소손녕은 고려가 옛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거란과 가까이 지내지 않고 송나라와 교류한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영토와 외교관계가 함께 얽힌 요구였다.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명분을 제시했다. 동시에 거란과 교류하려 해도 압록강 일대의 여진 때문에 길이 막혀 있다고 설명했다. 고려가 그 지역을 확보해 통로를 열면 거란과 외교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고려가 지키려는 영토와 거란이 원하는 외교관계를 하나의 협상 안에서 연결한 것이다.
서희는 상대의 목적을 읽고, 싸움을 멈출 수 있는 조건을 찾았다.
담판 이후 거란군은 물러났다. 고려는 후속 협상을 통해 압록강 방향의 영유권을 인정받고, 여진을 몰아내며 성을 쌓아 점진적으로 강동6주를 개척했다. 협상은 당장의 전쟁을 끝내는 데서 나아가 고려의 방어 기반을 넓히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협상은 고려의 항전 위에서 가능했다. 거란군은 안융진에서 고려군에 패해 진격이 막혔고, 이후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이 이루어졌다. 나라를 방어하는 힘과 대화를 통해 전쟁을 끝내는 능력이 함께 작동했다.
이 역사를 오늘 다시 읽으면 정치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전쟁이 길어지면 군인과 백성의 생명이 희생되고, 삶의 터전이 무너진다. 나라를 지키는 일에는 침략을 막는 군사적 역량과 함께, 더 큰 희생을 피할 외교적 해법을 찾는 책임도 있다. 서희의 담판은 그 책임을 보여준다. 김대중 대통령이 서희를 겨레의 스승이라 칭한 이유이기도 하다.
김대중은 대북정책의 세 원칙으로 무력도발 불용, 흡수통일 배제, 화해와 협력 추진을 제시했다. 국민의 안전을 지키면서 북한에도 공존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접근이었다. 무력도발에는 대응한다. 동시에 상대를 무너뜨리려는 의도가 없음을 밝히고,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 안보와 대화는 국민을 지킨다는 목적 안에서 함께 추진됐다.
햇볕정책을 이 관점에서 보면, 평화는 국민이 전쟁의 위험을 덜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현실적인 과제였다. 남북의 긴장을 낮추고 교류와 협력을 늘리는 일은 그 조건을 마련하는 방법이었다. 서희의 담판이 김대중의 햇볕정책을 직접 낳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김대중이 남긴 ‘겨레의 스승’이라는 평가를 그의 대북정책과 함께 읽으면, 오늘 우리가 배울 의미가 드러난다.
적대하는 상대와도 대화해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국가가 살아갈 길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이다.
서희는 거란과 고려의 이해관계가 만날 지점을 찾았다. 김대중은 남과 북이 서로를 위협하는 관계에서 벗어나 공존하고 협력할 가능성을 열려 했다. 서로 다른 시대의 두 정치는 대화를 통해 더 큰 충돌을 피하고 자국의 안전과 이익을 확보하려 했다는 점에서 함께 읽을 수 있다.
그 생각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구체적인 합의로 나타났다.
김대중은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평양에서 김정일과 회담했다. 분단 이후 처음 열린 남북정상회담이었다. 두 정상은 6·15 공동선언을 통해 이산가족 문제의 해결, 경제협력과 여러 분야의 교류, 합의 이행을 위한 당국 간 대화를 약속했다.
정상들의 대화는 사람들의 생활과 만났다. 이산가족에게는 가족을 만날 기회가 열렸고, 남북 사이에는 교류와 협력의 통로가 넓어졌다. 평화가 국민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결과였다.
물론 한 번의 합의가 이후의 갈등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남북관계는 다시 위기를 겪었다. 서희의 담판 이후에도 고려와 거란 사이의 전쟁은 재발했다.
‘전쟁 없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정치다’라는 말에는 지속적인 책임이 담긴다. 합의를 만들고 실행하며, 상황이 달라져도 충돌을 줄일 방법을 찾아야 한다. 평화는 한 번의 성취로 완성되지 않는다.

이천의 서희역사관은 2016년 6월 16일 문을 열었다. 효양산 자락의 공원에는 서희의 생애를 따라가는 조각 산책로와 역사관, 추모관이 있다. 이천이 오랫동안 이어온 서희 선양 활동이 오늘의 역사교육 공간으로 남았다.
역사관에서 우리는 서희가 무엇을 지키려 했으며, 어떻게 평화를 지켜냈는지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질문을 오늘의 한반도로 가져온다.
김대중대통령이 서희를 ‘겨레의 스승’이라 부른 말을 오늘 되새겨본다. 국민의 생명과 일상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정치인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정치의 책임을 배운다. 서희역사관에서 우리는 국민이 전쟁의 두려움 없이 살아갈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김대중의 평화정신을 가슴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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